2007년 12월 23일
[인터뷰]아오야마 신지, 그의 영화세계와 한국영화계에 대한 솔직한 심정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저와 제 친구 3명이 특별인터뷰어로 선정, 학교에서 이뤄졌습니다.
낮에 묵고 계시는 호텔로 가, 학교까지 안내를 했는데, 쯔루하시의 고기집에서
오찬을 함께 하면 이런저런 사담도 들려주시는 등, 영화처럼 무거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정말 좋으신 분이기도 했고 영화자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구요.
인터뷰는 총 1시간 30분동안 이뤄졌습니다. 사실 1시간 예정이었는데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나중에 저와 블로그와 현실의 개연성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30분정도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재밌었던 인터뷰였고요. 아쉽게 저녁자리에는 참석하지못 했지만
1시간 30분동안의 인터뷰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럼 인터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중간에 몇몇 질문들은 제외했습니다.
한국엔 개봉하지않은 영화들의 질문이라..)
나 : 바쁘신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오야마 신지(이하 아오야마) : 전혀요. 오늘 인터뷰를 무척 기대하고 왔습니다.
나 : 부담스러운데요 이거(웃음) 그럼 첫 질문을 하겠습니다.
처음으로 영화를 찍으려고 생각했던 계기는 무엇인지요?
아오야마 : 무척 어려운 질문이네요(웃음) 음....중학교시절부터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좀 더 어렸을 땐 괴수영화를 주로 봤었는데 그건 영화라기 보단 단순히 괴수를 좋아했었죠.
괴수에서 영화로 넘어왔던 단계....영화에 영화감독이 있고, 영화감독이 이 영화라는 세계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은 전적으로 스필버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전부터
부모님이 영화매니아였는데 어린 아이 둘을 집에 두고도 영화를 보러가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히치콕같은 이름은 뭐랄까.... 그냥 고유명사처럼 집안의 대화들에 등장하곤 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존 웨인같은 이들도 마찬가지죠.
다른 집과는 다르게 그런 이름들로 가족들과 난상토론이 이뤄지곤 했습니다(웃음)
나 : 정말 색다른 집이군요(웃음)
아오야마 : 그렇죠?(웃음) 에...그리고 중3때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도어즈를 알고 있었죠. 저는 록을 무척 좋아했었거든요.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들었는데 스필버그의 영화를 보기 시작한 그 시점과 비슷한 시기부터
록을 사랑하시던 할머니덕분에 록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비틀즈라든지, 롤링 스톤즈라든지 말입니다.
그것의 연장선상인 도어즈와 연관되는 지옥의 묵시록이란 영화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영화에 완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죠. 그때부터가 진짜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땐 영화는 단순히 감상용이었고, 그때까지만해도 '설마 내가 영화를
찍을 수 있겠어?"라는 감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1983년인가요? '미치광이 삐에로'와
'그녀에 대해 내가 알고 두세가지것들'이 리바이벌되어 나왔습니다.
그 두 작품을 보고 '이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지도'라는 엄청난 착각을 했습니다(웃음)
그때 고등학교친구들과 8mm영화를 찍곤 했었는데, 그 영화의 주연을 했던 놈과
학원을 땡땡이치고 제가 살고 있는 고구라에서 하카타까지 신칸센이면 15분 걸릴 거리를
1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가서 고다르의 영화를 본 뒤 또 엄청난 충격을 받고,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자신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떄까지 록밴드를 하고 있었는데 고다르를 만난 뒤, 밴드를 그만뒀습니다.
그 뒤, 대학에 들어가서, 하츠미 시게히코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에 의해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는 영화관이 완전히 뒤집어지게 되었죠. '내가 아는 영화는
빙산의 일각이구나'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에 의해 영화의 세계가 얼마나 큰 지
알게 되었고, 덕분에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 직후부터 나도 만들어보고 싶다는...그러니까 아까 그 '고다르에 의한 착각증후군'에 의해
말입니다. (웃음) 아무튼 그런 착각들로 릿교대학의 영화연구회라는 서클에 들어가 이런 저런
8mm영화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나 : 그렇군요. 그렇다면 8mm가 아닌 프로로서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신 적은 언제이신지요.
아오야마 : 이것도 정말 어려운 질문이군요. 사실 저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진 않았습니다.
사실 전 문예잡지의 편집장이 되고 싶었어요. 문예잡지의 편집장이 되면 많은 책들을 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때문에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제 마음 한구석에는
'영화를 하지않으면 안된다'라는 기분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도 알바를 뛰면서
8mm영화를 계속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찍고 있는 도중에 마지막에 찍은 작품..아니다,
그 전이군요. 그전에 찍은 8mm를, 저는 그러려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대학선배였던
쿠로사와 키요시와 만다 쿠니토시가 보러와주셨었죠. 보시고나서는 저에게 "재미있다"고.
"재미있는 부분도 있지만, 쓸데없는 장면도 있다"고 비평을 해주셨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엮게 되었고, 그 이후,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않았을 때, 만다 감독이 저에게 현장에서 미술도구스태프를 하지않겠냐고
권유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쪽에 가게 되었는데, 사실 그런 일을 하려고 하진 않았죠.
하지만 그런 현장의 일들을 직접 보고 싶다는 기분은 있었고, 모처럼 만다선배가 추천해주신
일이었기 때문에 '가겠다'고 흔쾌히 답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맛'을 알게되었고,
미술도구스태프를 거쳐 조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감독을 하고 있자니, 이 일이 너무 재밌는겁니다. 특히 쿠로사와 키요시같은 감독들과의
작업은 정말 재밌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엔 완전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영화배경을 제가 손으로 만들기도 했었구요(웃음) 그런 수작업을 통해 '영화가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라면...나의 인생의 일부를 걸어볼만 하다고 느껴 굉장히
즐겁게 일을 했었지요.
그리고 한편으론 '이렇게 쿠로사와 키요시 밑에서 쭉 일을 한다면 난 평생 재밌는 인생을
보낼 수 있을거야!'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쿠로사와 키요시의 추천인지, 프로듀서의 직감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날 한 프로듀서가 저에게 "감독을 해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더군요.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단호히 거절까지 했는데 막무가내로 찍으라는 겁니다(웃음) 작품이 나오면
그 판단은 우리가 할테니까 부담없이 찍으라고요. 그래서 찍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요. 이게 감독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웃음)
그 작품이 '교과서엔 없어'란 작품이었는데, 어차피 이 작품은 안될 것이라 제 자신이
굳게 믿었기 때문에 다시 조감독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와중, 또 다른 프로듀서와 알게 됐죠.
그게 바로 센토 타케노리였습니다. 그와 함께 시리즈영화로 현장에서 일을 했는데,
도중에 한 파트를 맡고 있던 감독이 그만둬 버렸습니다. 남은 시간은 3개월이었고,
그 시간안에 어떻게든 해야했습니다. 5. 6. 7월동안 말입니다. 암튼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갑자기 저에게 그 일이 주어졌고, 저는 일단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해서 나온 작품이
바로 '헬프레스'였습니다. '헬프레스'라곤 해도 저는 일단 다섯 작품을 대충 만들어서
센토 타케노리에게 건넸고, '달의 사막'도 그 중 하나였는데 '달의 사막'과 '헬프레스' 둘중에
뭘할까, 하다가 '달의 사막'을 찍기 시작했는데 잘 안 되서 '헬프레스'로 건너뛰었죠.
다 찍고나니 제 마음속에서
'이제 감독으로서 내 일은 진짜 끝났다. 다시 조감독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헌데 쿠로사와 키요시가 '너는 이제 감독이니 조감독으론 못 써'라고 말을 하는겁니다(웃음)
그러던 중 감독일이 또 들어왔고, 어쩔 수 없이 감독을 하게 되었고, 그게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 입으론 어쩔 수 없이 하기 시작했다곤 말했습니다만,
학생때부터 300~400편의 영화를 봤고 8mm를 찍으면서
'최선을 다 한다면 나에게도 영화라는 것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이 분명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네요.
나 : 그러셨군요. 프로감독은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일일 것으로 사료되는데
지금까지 영화를 찍으시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들, 그리고 어려웠다거나 두려웠던
일들이 있으신가요? 있다면 어떤 일들인지요?
아오야마 :
그것은 뭐, 그때그때 다르죠.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즐거운 일은 역시 제자신이 나이스샷이라고 생각되는 장면이 찍혔을 때입니다.
저만의 힘이 아니라, 스탭, 배우들의 호흡이 정확히 맞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때 그런 장면이 태어나는 순간이 아닐까요? 촬영이라는 것은 저에게 있어선 쾌락이거든요.
피곤에 찌들어있을 때에도 (영화를 찍는 것은) 쾌락 그 자체입니다..
반대로 가장 힘든 일은 편집입니다.제가 생각한대로 마음대로 편집하는 것은 일종의
쾌락이지만, 그것에 대한 혐오감 또한 있기 마련입니다. '뭐야. 내 생각대로 나와버렸잖아'
그런건 재미없지않습니까? 그 따분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합니다. 하지만
다른 일을 하기위해선 다시 괴로워해야하죠. 그건을 편집으로 푸는겁니다. 결국 하고 싶지않은
상황에 이를 때도 많습니다. 그것을 술로 풀어 몸을 망치는 경우도 종종 있구요. 그정도로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편집에 제한 시간이라는 것은 프로의 경우, 길게는 1달정도죠. 하지만 프랑스인에게
이 말을 하면 "그건 겨우 첫단계일 뿐이잖아. 그때부터 영화가 만들어지는거 아냐?"라고
말하곤 해요. 그래서 "그럼 니들은 얼마나 걸리는데?"라고 말하면 "길면 1년정도?"래요.
저는 28일, 4주 조금 더 되는 시간을 언제나 정해놓고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음성편집을 다시 한달동안 하죠. 그 시간이라면 아주 약간 편집을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합계 2개월하고도 2주간정도를 투자하면 편집이 완성되는 셈이죠. 옛날엔 전부 다 해서
1달만에 하고 했었는데 말입니다(웃음) 뭐 프로듀서로부터 요청도 있었고, 예산적인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 길게 끌고 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어요.
나 : 그러셨군요. 특히 영화같은 영상물의 편집은 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배우들이나 스탭들일 것 같은데, 영화감독직을 하시면서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오야마 :
운명,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겠네요. 의도한 것이 아닌, 가끔씩 열리는 오디션이나 지인들의
소개로 만나는 만남이 계속되는 것 같은 말입니다. 어디선가 서로에게 딱 맞는 부분도 있고요.
저는 그들보다 나이가 많기 떄문에, 책임감을 가집니다. 꼭 나이가 많아서 그렇게 하지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아니고, 인생선배의 훈시도 아니지만, 일을 해나가는 한에 있어선 나이가 많든 적든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그런 운명적인 만남들이 저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고
있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런 만남을 그냥 일상적인 관계로서 유지해가는거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 관계들 중엔 가끔씩 도요타 마호와 결혼하는 등의 일처럼 타이밍의 문제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타이밍과 우연들이 제 주위에서 언제나 돌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길게는 15년에서 20년간 일해왔습니다.
"슬슬 (같이 하지않아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할 때 있죠. 타무라 마사키(아오먀마 신지 전속
카메라맨 / 역주) 같은 사람과 일을 수십년간 같이 해왔지만, 소통방식에 있어선 변화가 있었습니다.
신선함이 사라진 것일지도 모르고, 서로 다른 가능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부터는 타무라씨완 일하지않을거라 결정했고, '새드 베케이션'에선
서로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다는 느낌으로 일했습니다. 또, 그런 '완전연소'된 감정을 유지하며
계속 일해나가는 관계도 있죠. 결국 , 다음 단계로 스텝업하는 관계도 있는가하면, 거리감은 있지만
서로 필요하기에 일을 하는 관계도 있는 것이기에, 여러가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나 : 운명이라...그런데 그 운명이라는 것을 감독께서 직접 만드시는 영화와는 엇갈릴 때가
있을 법도 한데요. 감독님은 영화의 이미지를 배우에게 맞추시는지, 아니면 배우의 개성을
영화에 맞추시는 지, 어떤 쪽이신가요?
나 : 분위기를 좀 바꿔보겠습니다. 감독님 표정이 너무 진지해지셨어요(웃음)
최근, 그러니까 요 몇년간 한국영화를 비롯한 아시아영화들이 꽤 높은 평가를 받으며
주목 또한 받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일본영화는 예전부터 평가가 높았다곤 쳐도
요즘 뜨고 있는 한국영화는 저에게 있어선 무척 흥미로운 일중 하나죠.
감독님께선 한국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오야마 :
우선 짚고 넘어가고 싶은게 있습니다. 저는 영화는 국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 작가(감독)가 무엇을 보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영화가 크게 바뀝니다. 이것의
예외적인 것으로선 미국영화가 있습니다. 미국영화라는 것은, 영화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예외적인
필드라고 할 수 있죠. 단지 그 중에서 쿠엔틴 타란티노같은 변종도 가끔씩 태어나는 법이구요(웃음)
본론으로 들어가서, 한국영화에 관해서 저는 확실하게 말하자면 이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진 단순히 버블이었다고 말이죠. 이 버블이 끝나면 현장에 있던 인간들은, "무엇이
진짜 영화인가"라는 질문을 향해 가지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서울에 가서 많은 한국의 영화연구자나 비평가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이 판이라는게 양립화하고 있다는 생각 또한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쪽에선 영화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세계의 영화들을 연구하고, 또 다른 쪽에선 영화를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산업으로만 생각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영화라는
것으로 존재해주면 좋은데 산업, 경제화된 현재엔 그럴 수가 없지요.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경우엔 저같은 위치에 있는 감독들이 어떻게든
양극화를 융합하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인데. 과연 한국에서도 그것이 융합될
수 있을지, 지금까지의 버블이 너무나도 컸던 탓에, 너무나도 급격스러운 버블화 탓에
그 두 판의 융합은 불가능하지 않나 하는 같은 생각도 듭니다.
일본은 아직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구요. 저를 비롯한 몇몇 감독들이 그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죠.
한국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지만 그런 버블들 때문에 한국의 상황이 조금 힘들어지지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몇년간, 헐리우드의 막대한 자금이 들어와, 예를 들면 판권을 구입한다던지하지않았습니까?
. 그런 영화 버블들이 지금까지완 색다른 형태로 나타나곤 하는 겁니다.
그런 형태를 지지해오는 상업적인 힘이 지금의 한국영화계를 억압해버린다면 진정한 영화적인 연구에서
미국의 그런 상업적인 것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사라져버릴 겁니다.
일본은 이미 그것을 실패해봤기에, 그러니까 헐리우드에 융합되는 형태에 실패했었지만, 그로 인해
아직 그런 예술성과 상업성의 두마리 토끼를 잡는 가능성은 아직 남아있는 셈이죠. 한국은
그 가능성을 남겨, 더욱 가능성을 높힌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단 일본영화가 바보같은 이유는, 배우들의 영어가 완전히 안된다는,
애초부터 X같은 일본의 영어교육의 폐해때문입니다.
한국과 중국은 영어교육이 성공했죠. 한국과 중국의 영화인들은, 세계속의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본적인 영어라는 힘이 있지만 일본인은 그로 인해 고립되어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런 영어라는 힘들이 한국과 중국의 영화,
혹은 다른 아시아의 영화들이 세계화속에서 동양적인 것으로 브랜드화 되어있는 반면,
일본영화는 그 동양적인 카테고리조차 되지 못 합니다.
나 : 하지만 일본영화는 동양적인 영화라기 보다는 '일본영화'라는 자체적인 브랜드로 성공을 거두지않았습니까?
아오야마 : 바로 그렇죠. 일본은 일본이라는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었다고 봐야죠. 그것을 장점으로 봐야합니다만
일본영화계의 많은 인물들은 동양적인 그런 브랜드로 통합되길 원했죠. 마케팅성으로 봤을 땐 그것이 훨씬
유리하니까요. 하지만 감독입장에선 그게 쉽지않죠. 그게 미묘한 차이랄까요?(웃음)
그리고 한국영화는 단절, 예를 들면 과거 독재군부시절의 그런 억압들로 인해 일시적으로 영화가 단절
되었습니다. 한국의 50~60년대 영화들은 정말 지금봐도 훌륭한데 그 한가운데가 통째로 잘려나간 셈이죠.
하지만 그런 억압과 단절들이 지금의 성장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죠.
나 : 중국은 지금도 굉장히 탄압을 받고 있지않습니까?
아오야마 : 그렇죠. 하지만 중국인들도 그 탄압속에서 더욱 멋진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하조직을 통해 나오는 영화들 있지않습니까? 그런 영화들을 통해 세대는
바뀌지만, 그 세대가 소통할 수 있는 공통된 테마는 가지고 나올 수 있어, 결국 그들은 영화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거죠.
나 : 그런 공통된 테마를 통해 쭉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하셨는데, 일본영화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오야마 : 하지만 일본영화계엔 단절이 없죠. 마치 단절되어있는 것 처럼 보여지고 있지만, 실제론 아주 미묘한
연결고리가 저희 세대와 아래세대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단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제가 43살인데, 저로부터
5~6살 이하의 감독들 혹은 더욱 젋은 사람들과는 단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제가 그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가장 많은 세대는 바로 그들, 젊은 세대들이죠.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지않은 것, 단 그 세대안에는 제가 가르친 사람들도
있죠. 그렇기에 그 라인은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저보다 윗세대의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소통할 수 있는 세대는 쿠로사와 키요시정도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세대, 혹시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시오타 아키히코, 만다 쿠니토시같은 감독들,
그리고 동경대 출신감독들 즉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영화의 비평을 써왔고, 그 비평으로
그 윗세대들과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아랫세대의 사람들은 그런 비평의 장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비평의 중요성을 느껴왔고, 저를 포함한 저희 세대들은 영화를 만드는 것 만큼 비평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왔는데 지금 세대들, 30대보다 어린 세대들은 그런 것들이 없죠. 결국, 비평을 쓸 공간이
사라짐에 따라 일종의 세대의 절단면을 낳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나 :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중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려주셨어요.
마지막으로 한국에도 계신 한국팬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아오야마 :
하하 제가 처음으로 제 영화를 해외에 상영하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제 영화를 보시고 웃어주셨던
적이 있습니다. 전주영화제에서 '처마밑의 부랑아'라는 작품이었는데, 그 영화의 한 신에서
폭소를 터뜨려주시더라고요. 저는 개그를 좋아해서 간혹 영화에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을 넣곤하는데
다른 영화제에 들고 나가면 잘 안 웃어주시는데 한국분들은 그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려주십니다(웃음)
그리고 얼마전에 부산영화제에도 영화를 출품했는데 또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아! 내 개그는 한국에서 통하는구나!"라고요(웃음) 물론 일본에서도
통하긴 하는데, 한국관객들의 반응은 정말 뜨거웠기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유럽에선 도통 웃어주질 않더라구요. 대신 "최고였다"라고 말해주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 말이 도통 믿기지가 않아서 속으론 '진짜냐?'고 반문하고 싶지만(웃음)
정말 한국팬들은 정말 제 영화를 잘 이해해주십니다. 사실 그때까지 한국관객들을 신경쓰진않았는데
나 : 사실 오늘 만나기 전엔 감독님을 조금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했었는데, 의외로 정말
재미있으신 분이시군요(웃음)
아오야마 : 사실 전 의외로 재미있는 사람이랍니다(웃음)
# by | 2007/12/23 03:40 | 홍돈이야기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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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아오이 떄문에 이런 활동하시는 홍돈님이 부럽네요!
저도 유레카 밖에 안 봤는데 괜찮은 영화지요!
어떤 방식으로 연락을 드려야 할 지를 모르겠네요; 메일주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적어주신 메일로 제가 연락 드리겠습니다. 휘리릭~~
서울에선 스폰지하우스라는 곳에서 개봉한다니 참고하시면 좋겠네요(압구정에 있다는군요)